3월, 우즈베키스탄 축구 팬들에게는 큰 승리로 열광할 만한 경기가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이 처음으로 U-20 아시안컵의 챔피언이 되었다. 우즈베키스탄 청소년 팀은 호주, 시리아, 한국, 이라크 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오늘 우리는 이 승리를 이끈 축구 팀의 멘토인 드미트리 안과 이야기를 나눴다.
축구 팬들이 청소년 국가대표팀의 승리에 기뻐하는 동안, 팍타콜 축구교실 드미트리 안 코치에게 이 승리가 더 자랑스러운 이유가 있다. 그의 학생 중 9명이 우즈베키스탄 청소년 팀에 합류하여 아시안컵의 우승을 가져온 주역으로 뛴 것이다. 한 코치가 배출한 9명의 제자가 보인 전례 없는 뛰어난 성과는 수년간의 훈련의 결과이다. 다음 무대는 5~6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리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가 될 것이다. 질문도 필요 없이 우리는 바로 그에 대한 소개를 시작한다. 맞다. 드미트리는 1979 년 드네프로제르진스크 상공에서 추락한 비행기에 탑승했던 전설적인 팍타콜의 선수인 미하일 안의 아들이다. 드미트리의 아버지는 영웅이라 불린다. 비행기가 추락한 해에 이 소년은 5살이었고 그의 여동생 엘리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녀는 미하일 안이 세상을 떠난 지 3개월 뒤인 11월에 태어날 예정이었다.
-우리가 공항에 가는 길에 아빠가 나에게 우승컵을 들라고 어린 나에게 주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남아있다. 당시 소련 국가 대표팀은 청소년 팀 대회에서 유럽 챔피언이 되었다. 이 기억 말고 다른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훈련 캠프와 대회 참가로 항상 여행 중이었다. 그때 그날도 그 경기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지 않았어도 되었다. 아버지는 그저 팀을 배웅하러 공항에 갔고 여권도 가지고 가지 않았는데 그냥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드미트리의 어머니, 클라라 블라디미로브나 엄은 지역 집행위원회에서 수석 재무담당자로 일했다. 드미트리는 어머니가 매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 어머니 덕분에 가족은 어려움 없이 살았다. 어머니는 매우 바빴지만 일과를 완벽하게 해내셨다. 어머니는 직장에 지각하는 일도 없었고 또한 항상 딸을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것도 하고 집을 정결하게 하고 배부르게 풍성한 식사를 준비하였다.
— 어머니는 아버지를 아주 많이 사랑했고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머니에게는 재혼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의 재혼에 대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끔 «누군가가 어머니 옆에 있으면 더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한다. 드미트리는 그의 직업 생활 중에도 아버지의 모습이 흔적으로 남아있다고 말한다. 그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임을 과시하지 않지만 축구장에서는 모두가 미하일 안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영웅의 아들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않도록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는»아들이 되는 것이 그에게 항상 중요했다.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 미하일에 대해서도 좋은 말만 한다.
— 5년쯤 전에 한 통의 전화가 왔는데,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로 전직 조종사인데 나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만남의 장소에 도착하고 아버지의 오래된 통과증을 받았다. 이 조종사는 팍타콜 팀의 경기를 위한 비행기를 조종했던 것 같다. 그는 어느 날 아버지에게 다가가 기념할 무엇인가를 요청했다. 아버지는 가지고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 통행증을 주었다. 조종사는 수년 동안 기념품을 보관하다가 나에게 주기로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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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살 때 드미트리의 어머니는 그를 «Старт»경기장의 축구 교실로 데려 갔다. 우리 주인공의 첫 번째 코치는 블라디미르 코마린스키였다.
— 나는 키가 컸기 때문에 수비를 맡았다. 상대팀이 덩치 큰 녀석들을 통과하기 더 어렵고 게다가 나는 긴 다리 덕분에 상대를 쉽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즉, 비거리 속도가 좋았다. 팀원을 선발할 때 코치는 아이에게 «축구에 대한 이해»가 있는지 여부를 확인한다. 축구는 공을 따라 경기장을 배회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축구 아카데미에는 체스 실이 있다. 체스를 통해 선수들은 빠르게 생각하고 전술적으로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능력을 개발한다. 디마는 이러한 «축구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2 년 후 재능 있는 십대는 블라디미르 본다렌코가 개설한 팍타콜 축구 클럽의 특별 수업에 초대되었다. 아이들은 정규 학교에서 공부했지만 스포츠 일정에 따라 아침-훈련, 수업, 수업 후 점심 식사, 훈련, 그리고 다시 훈련의 일정으로 훈련하였다. 어린 축구 선수는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 왔다. 이런 훈련 일정으로 어린 운동 선수는 6 학년에서 9 학년까지 살았고 «FC Pakhtakor»에서 뛰었으며 우즈베키스탄 청소년 팀의 일원이었다. 발레리 케치노프(Uzbek Pakhtakor 및 Russian Spartak, Saturn-REN TV, Shinnik 선수), 니콜라이 쉬르쇼프 (3 개의 아시안 컵 무승부 참가자, FC선수 » Pakhtakor», «Rostov» 및 기타 러시아 클럽의 선수)와 같은 미래의 축구 스타가 같은 그룹에서 그와 함께 훈련했다. 이 특별반 중에서 6명이 이후 소련 대표팀에 합류했다. 학교에서 디마는 활동적이었다. 그는 앞서 나가는 최초의 사람 중 한 명이었고 공부를 잘했으며 학급 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를 모범적인 아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이 영웅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 (당시 몽골 영사의 아들)와 함께 옆 반 소년들과의 싸움을 기억한다.
— 나는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축구는 재미있고 흥미 진진한데 수업은 지루하다. 하지만 어머니가 숙제와 일기를 확인하여서 성적이 좋았다. 한때 그녀는 아들이 3학년이 되기 전에는 우수한 학생이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사실, 어머니는 6 학년 이후에 수업이 더 이상 우선 순위가 아닌 특별 수업에 들어갔기 때문에 여전히 6 학년까지는 그래도 교육 받은 것이 있다고 농담한다. 그 후에는 원정 경기를 시작했고 성공적이었다.
FC «Pakhtakor»와 함께 드미트리는 14개 공화국을 여행했다. 청소년 팀은 1 년 동안 트빌리시, 빌뉴스, 리가, 폴타바, 루간스크, 민스크, 텔랴빈스크 등 최소 3 번의 원정 경기를 가졌다. 드미트리는 아침 6 시부터 당시 모든 사람이 다 먹고 싶어 하던 소비에트 시대에는 아주 유명한 키예프 케이크를 사기 위해 줄을 서기도 했다. 가게는 9시에 문을 열었고 케이크를 한 명 당 하나씩 살 수 있었다. 13세 소년들은 소중한 디저트를 집에 가져오고 싶어 긴 줄을 섰다.
— 나는 평생을 축구에 바쳤기 때문에 집안일은 거의 안했다. 나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서 밤 늦게 돌아왔다. 사실, 한때 어머니는 유니폼을 빨기에 너무 피곤해서 나에게 직접 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지시를 무시하고 어제 썼던 운동화와 운동복을 그대로 학교에 가져갔고 축축하고 불쾌한 냄새가 나는 옷을 입고 훈련을 했다. 그 이후부터 나는 매일 열심히 축구 장비를 닦았다.
9학년을 마치고 드미트리 안은 공화국 전역의 재능 있는 운동 선수들이 모인 티토 이름을 딴 공화국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현재 그 학교는 올림픽 예비 선수들을 위한 공화국 전문 기숙 학교이다.
그녀의 차분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클라라 블라디미로브나는 아들에게 한번 빗자루를 사용했다. 지역 학생들은 기숙 학교 내에서 살았고 타슈켄트 학생들은 집에 가서 밤을 보내고 방은 옷을 갈아 입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디마는 술을 마시고 4 일 동안 집에 나타나지 않았고 어머니에게 빗자루 세례를 받았다. 기숙 학교에 친구와 자유가 있다면 어떨까? 소등 후 선생님은 집에 가고, 창문을 통해 나가서 포도와 사과를 사고, 그 후에 동료 운동 선수들과 재미 있고 사교적인 방식으로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디마는 16 세에 첫 월급을 받았고 모두 어머니께 드렸다. 당시 수석 재무담당자의 월급이 120 루블였던 것에 비해 엄청난 액수인 450 루블이었다. 클라라 블라디미로브나는 즉시 코치에게 전화를 걸어 그러한 돈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냈다. 10대에게는 금액이 너무 커 보였다. 이것이 실제로 축구 경기 후 받은 수입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진정하였다. 두 번째 급여는 어머니께 절반을 드리고 나머지는 자신을 위해 썼다. 그 후 드미트리 안은 국립 체육대학에 진학하여 대학 교육을 받았으며 동시에 우즈베키스탄의 우수 축구 리그에서 뛰었다. 어느 시점에서 그는 무릎에 대해 걱정되기 시작했지만 그것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선택했다. 더 이상의 침묵이 불가능해졌을 때, 젊은 선수는 긴 15년 동안의 축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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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주변 상황은 계속해서 그에게 스포츠인으로 살게 했다. 이전의 동급생들은 그가 축구의 세계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 그들 중 한 명이 훈련을 받고 코칭 면허를 받으라고 조언했다.
— 그때 나는 “왜 안되겠어? 게다가 살도 빼야 하는데.» 그리고 상상하지 못했던 코치 과정에 매료되었다! 아이들이 멘토의 말을 얼마나 관심 있게 듣는지, 코치가 전하는 지식에 얼마나 열성적으로 끌리는 지를 보고 감동했다. 팍타콜 아카데미의 부회장은 드미트리에게 코치 자리를 제안했다. 그의 첫 번째 훈련팀은 7세 어린이 그룹이었다. 초보 코치는 팀을 위해 진지하고 책임감 있는 어린이를 선발했다. 그는 게으르면 재능이 많아도 스포츠에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 자신도 어린 시절 그런 게으름을 피웠었지만.
— 나에게는 착하고 똑똑한 코치가 있었는데, 때때로 우리는 그를 속였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팍타콜 경기장 주변에서 왕복으로 달리도록 하면, 우리는 모퉁이를 돌고, 멈춰 쉬고, 나머지가 원을 돌 때까지 기다렸다. 다음 원을 돌 때 또 다른 누군가가 쉬고 나머지는 달렸다. 이런 예를 들면서 나는 그들이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아이들에게 설명한다. 드미트리는 학생들을 꾸짖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것은 팍타콜 아카데미 발레리 보로브킨 부회장에게 배운 장점이다. 초심자 코치로서 우리의 주인공은 그 부회장에게 평가와 조언을 요청했다. 그때 그는 “아이에게 소리를 지를 때, 거울을 보라. 자신에게 소리지르는 것이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할 줄 모른다는 코치의 탓이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주인공은 학생이 현장에서 실수를 했다면 코치로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고 설명하지 않았으며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을 사실을 새긴다.
— 처음에는 7세 아이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스트레스였다. 축구 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는데, 이들은 아이들이고, 그들은 뛰고 장난치고 싶어한다. 예를 들어 균형 훈련을 위해 큐브를 만들었다. 한 그룹이 공을 가지고 노는 동안 다른 그룹은 균형을 연습하면서 블록 위를 걸어야 한다. 그런데 등을 돌리자 마자 소년들은 벌써 이 큐브로 집을 짓고 있다!
하지만 매년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지식을 흡수하는지 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그들은 축구에 대한 열정이 너무 강해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할 수 있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본다. 2년 간의 훈련 끝에 드미트리 안의 학생들은 타슈켄트 챔피언십에 참가했고 바로 1위를 차지했다. 그 다음 해에도 상황은 반복됐다. 여덟 번 우승! 타슈켄트 축구 선수들이 참가한 가장 높은 카테고리인 전국 대회에서도 4 번의 우승을 했다. 사례가 더 있었는데, 우리는 «Ёшлар»스포츠 경기장에서 훈련했다. 내가 훈련을 위해 아이들을 데리러 나갔을 때 한 어머니가 물었다. “드미트리 미하일로비치, 눈치 채지 못했나요? 애들 좀 보세요.» 그룹의 절반이 나와 같은 헤어스타일로 이발을 했다! 8-9명의 아이들이 다 똑같이 머리를 깎았다!
훈련에서 드미트리는 실제 경기에 가까운 조건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훈련중에는 운동 선수가 상대편의 압력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없기 때문에 이긴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축구 선수가 자신의 홈 그라운드에서 벗어나 짧은 시간에 일련의 결정을 내리는 훈련을 하면 실제 경기에서 그는 신속하고 전술적으로 올바르게 행동하게 된다.
가장 어이없는 패배는 알마티에서 일어났다. 당시 우즈베키스탄 팀은 상트 페테르부르그 «Ёшлар», 트빌리시 Tbilisi «Динамо»과의 경기에서 우승했으며 준결승에서 타지키스탄 팀에게 패했다.
— 경기는 우리 쪽이 이끌고 있었고, 득점 찬스가 많았지만 골로 연결하지 못했다. 상대의 공격은 거의 없었고, 우리 골키퍼는 경계심을 잃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그를 이해한다. 우리는 후반 35 분을 플레이 하고 있었고 십대가 한 시간 동안 그저 골문을 지키고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타직 팀의 선수가 «기습»이라고 말하면서 볼을 찼고 볼은 골문을 흔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1:0의 점수로 승리했다. 나는 우리 팀이 골키퍼를 비난하게 두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또한 한 선수가 전체 결과에 대해 책임질 수는 없다. «공격팀이 모든 기회를 골로 연결했다면 우리는 몇 골을 넣고 이겼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축구에서는 승리는 팀의 몫이고 지는 것의 책임은 코치가 진다. 그날 드미트리는 각 플레이어와의 실수를 복기했고 십대들은 모든 사람이 패배에 똑같이 책임이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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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의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세르게이는 타슈켄트 경영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지만 그의 인생에서 스포츠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조정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챔피언이다.
— 세료자가 9 살이었을 때 나는 그를 축구 교실로 데려 갔지만 그는 그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훈련을 하는 아들을 보기 위해 동료에게 데리고 갔다. 첫째, 세르게이는 필드를 뛰어 다니기 싫다고 «문지기»가 되겠다고 바로 말했다. 둘째, 어느 시점에서 그는 지루해져서 잔디밭을 헤매며 민들레를 수집했다. 그 후 그를 축구장에서 데려고 나왔다. 사람은 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들이 좋아하는 스포츠를 찾으라고 세료자에게 한 달을 주었다. 스포츠는 자기 단련이며 건강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노를 젓는 운동에서 흥미를 찾았다. 아들을 집으로 데려 오러 안호르 강에 간 적이 있다. 겨울, 밤 9시, 추위와 어둠 속에서 14세의 10대들이 이 어둠 속에서 헤엄쳐 나왔다. 그들은 땀에 젖어 앞섶에는 얼음이 얼은 채 해안으로 노를 저었고 그 무거운 카약을 강 기슭에 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아버지로서 나는 «세료자, 겨울에 훈련에 가지 마라.»하고 말했다. 그러나 아들은 여전히 훈련하러 다녔고, 훈련 캠프에 갔고 챔피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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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드미트리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한 동료가 2003년생 그룹이 아카데미에서 최약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미래 스타의 코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속으로 웃었다. 오늘 2003년에 태어난 아주 약한 아이들이 U20 아시아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현재 드미트리 안은 아시아 국가에서 훈련할 수 있는 국제 과정을 수강하고 있다. 마지막 단계의 시험에 합격하고 주머니에 국제 면허증이 가져오는 일만 남았다. 그는 어떤 나라에서든지 축구 클럽을 이끌고 그들을 챔피언십으로 이끄는 것을 꿈꾸고 있다.
글: 예카테리나 초이
번역:김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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Источник: «Корейцы Узбекистана» № 7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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