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그 영원한 젊음

빛나는 멤버들로 이루어진 ”청춘 더 빛나는 집단 농장 ”폴리토델”의 역사에서 떼어낼 수 없는 일부이다. 수많은 상을 받고 많은 대회의 우승자였던 이 앙상블은 멤버들의 특별한 재능과 ​​높은 전문성 그리고 티모페이 황 회장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소련 전역에서 명성을 얻었다. 소련의 붕괴 전이나 그 후에도 이 앙상블 팀의 성공적인 활동을 따라올 팀은 없었다. ”청춘”의 활동과 멤버, 공연 그리고 저명한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하여 ”청춘”의 기타리스트이며 보컬인 티모페이 그리고리예비치 황 회장의 아들 예브게니 티모페예비치 황과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팀의 만들어지기까지

“60 년대 말에 부모님은 아버지의 친척들과 더 가깝게 지내게 하기 위해 나를 카라간다로 보냈다. – 에브게니 티모페예비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많은 친척을 만나는 것 외에도 당시에 기타 연주를 꽤나 잘하던 사촌과 6촌 형들의 영향으로 기타의 매력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 와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기타 연주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서 나무로 만든 기타로 ‘띵가띵가’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는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의 시대였고 젊은이들은 ‘철의 장막’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연주를 듣고 외국의 우상에 열광하였다.

블라디미르 리, 발레리야 김, 이노켄티야 황 그리고 나, 우리들은 이런 추세를 비껴가지 못했다. 따뜻한 계절에는 거리에서 리허설을 했지만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비틀즈와 함께 하기 위해 모일 장소가 필요했다.. 우리들은 팀을 조직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문화의 집’에 작은 연습실을 부탁하기 위해 아버지와 이야기 해보기로 했다. 집단 농장 회장의 자제들로서 어떠한 특권의식도 없었고 방종한 사람들도 아니었기 때문에 아버지께 개인적인 부탁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버지께 상의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우리 멤버들의 요구는 강력했다.

아버지께서는 먼저 우리들의 “예술적인 능력”을 보여 달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우리들의 가능성을 보셨는지 혹은 아버지의 예지력이었는지, 예술에 대한 아버지의 특별한 직관과 애정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 앞에서 우리는 몇 곡의 노래를 연주했다. 그 후에 ‘문화의 집’에 있는 작은 방에서 연습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고 고려인 전통 노래와 춤을 주요 레퍼토리로 삼는 ”아라리” 공연단의 콘서트에 우리의 노래로 참가할 기회도 얻었다. 우리에게는 오래된 앰프가 할당 되었고 처음 시작할 때 우리 팀에 2 ~ 3 개의 노래를 배정해 연주하고 나면 전체 콘서트가 시작되었다. 첫 무대는 성공적이었고 리허설은 힘든 줄도 모르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고정 레퍼토리를 확정해야만 했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미 VIA (보컬 악기 앙상블)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기 때문에 고품질 장비 및 악기를 구입해야 했다. 그 당시에 더군다나 아마추어 팀이 악기나 전문 음향 증폭 장비를 갖추었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고 수요는 많지만 악기는 구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악기를 구입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였다. 그런데 바로 이때 티모페아 그리고리예비치 황이 우리를 구원했다. 연주하는 팀들의 성공이 악기의 품질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고 우리 팀이 헝가리 회사 ‘Beag’의 장비를 구하도록 도왔다.

– 우즈벡 공화국 전체에 5 개의 장비 세트가 순차적으로 공연이 배당되었다. 그 중 4 개는 이미 팀들 사이에 할당이 되었으며 하나만 남아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임무를 내리셨다. 그 하나가 지금 어디인지 알아보라고 도시로 보내셨다. 나는 하루 종일 그 ‘소중한 보물’이 있는 주소를 검색하고 찾아 다녔다. 마침내 그 ‘소중한 장비 세트’가 있는 곳을 알아냈다. 그리고 난 후 아버지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어떤 사무실에 가셨는지, 누구에게 전화했는지 몰랐지만 얼마 후 우리는 ‘문화의 집’ 무대에 새로운 장비를 설치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발전을 위한 큰 선물이었고 우리가 그것으로 무장하면서 완전히 다른 수준의 음악을 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활동의 날개를 펴다

– 1971 년은 우리가 이미 독립적인 팀으로 활동하면서 점점 더 많은 초청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우리 팀의 이름을 지어야 할 상황이 되었다. – 예브게니 황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 당시 우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멤버가22 살이었고 가장 나이가 어린 팀원은 겨우 12살 밖에 안되었다. 팀원들의 연령 특성을 고려하여 “청춘”으로 이름을 짓기로 하였다. 그 뜻은 “젊음”이다.

첫 앙상블 팀은 17 세의 게라심 강(베이스 기타), 17세의 플릭스 김 (솔로 기타); 18 살의 발레리 김 (드럼), 12 세의 유리 조(키보드), 22 세의 예브게니 황(보컬, 리듬 기타)로 구성되었다. 예브게니 황이 이 팀의 음악 감독으로 자신의 동급생, 티모페이 황을 불렀다. 그는 트렘펫 연주에 탁월했다. 팀 구성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팀의 시작은 바로 이 젊은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1972 년,“청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있었고, 이 일은 향후 10 년 ”청춘”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 일은 바로 우리가 “Young Voices” 대회에서 우승한 일이다 – 라고 예브게니 티모페예비치는 회상했다. 그 우승으로 ‘폴리토델’ 집단 농장의 삶에 대해 알기 위해 오는 손님들을 위한 콘서트 프로그램은 말할 것도 없이 각 지역 및 우즈벡 전지역에서 다양한 축제 행사, 경연 대회에서 공연하게 되었다.

그 때쯤 “청춘”의 멤버가 바뀌었다. 게라심 강이 군복무로 떠나고 그의 자리를 블라디미르 강이 대신했다. 1 년 후, 펠릭스 김도 군복무로 기타리스트인 다른 발레리 김으로 대체되었다. 우리 앙상블은 TV 콘테스트 “Young Voices”의 올해에 인기 있는 연주가를 찾는 “Hello, 우리는 재능을 찾고 있다!”에 참여했다. 대회는 2차 라운드로 진행되었다. 첫 라운드에서는 대회 초청 앙상블의 이름과 같은 곡을 노래했다. 음악 감독이 자신의 아버지 황정손 씨의 시에 곡을 붙여 “청춘”이라 곡을 만들었다. 이 곡은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두 번째 라운드는 더 어려운 과정이었다. 우즈벡 언어로 된 작품을 공연해야 했으며 참가자들은 그 해 유행하던 우즈벡 작곡가 I. Akbaro가 작곡하고 이전에 바트르 자키로프가 불렀던 “Kaidansan”을 선택했다. 이 라운드를 준비하면서, 어떤 싸한 느낌이 들었다. 두 번째 라운드의 심사위원장은 작곡가 자신인 I. Akbarov.였다. 또한 티모시 황은 멜로디를 앙상블에 맞게 변경하여 부르게 했다. 게다가 “청춘”은 13 번째 순서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 팀은 모스크바 결승에서 우즈벡 공화국을 대표할 권리를 얻었다.

– 완전한 성공이었다! – 예브게니 티모페예비치는 회상하였다. -모스크바 공연 리허설까지 우리는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폴리토델’ 지도자는 우리 팀에게 연습을 위해 직장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주었다 (당시 우리는 각각 농장의 자물쇠, 페이트공, 연락 책임자로 근무 중이었다), 축구 선수들의 숙소를 제공해 주어서 우리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아침부터 밤까지 연습을 했다. 우리 팀에 필요했던 트럼펫 연주자 아벨 김과 색소폰 연주자 이노센트 강이 새로운 멤버로 보강되었다. 장비와 기기 문제가 해결되면 무대 연출을 더 좋게 만들 일만 남았다. 그 당시에는 무대 연출자나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타일리스트가 없었다. 당초 팀을 구성하고 활동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외관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저 우리의 우상이던 유명한 비틀즈와 같아 보이기만을 원했다.

저명한 축구 선수인 미샤 안이 스포츠 팀에서 유행하던 청바지와 데님 셔츠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이제 관객이 많아지고 팀의 인기가 높아져 때로는 촬영에 참여해야 했고 무대에서 보여질 자신의 스타일을 개발해야 했다. 미래에 우리 팀의 솔리스트 중 하나가 될 밀라 (음악원의 학생)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다시 도와주셨다. 아버지는 나의 어머니(알렉산드라 필리모노브나 윤)가 일했던 집단 농장의 양장점으로 파란 레이온 한 롤을 보내셨다. 그곳에서 팀원들의 칫수를 재고 모두의 무대 의상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 의상을 입고 “Young Voices”공모전 결승에 진출했다.

”청춘”은 한 달 후에 새로운 핀란드식 갈색 의상을 준비해서 결승전을 위해 모스크바로 갔고, 당시에 가장 좋은 호텔 중 하나였던 ”젊음”이라는 호텔에 묵었다. 수도에 대해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다양한 문화적인 프로그램이었고 중앙 방송의 촬영과 대회의 우승으로 결국 우리는 새로운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되었고, 전 소련지역에서 유명해졌다.

이후 1977 년과 1979 년에 ”청춘”의 공로와 업적으로 우즈베키스탄의 콤소몰과 지역 콤소몰에 상이 수여되었다. 또한 예브게니 황을 포함한 팀원들은 ‘인민 경제 성과 전시회’에 수상자가 되었다.

”청춘”의 멤버들

70년대는 우리 앙상블 팀의 전성기였다고 예브게니 티모페예비치는 말한다. 보컬리스트에 신 갈리나, 조야 김, 밀라 리, 위대한 기타리스트 보랴 토흐타후노프, 색소폰 연주자 아킴 잘다소프, 발렌틴 김 그리고 발레리 김과 여타의 팀원들이 활동했다. 그들 각각은 ”청춘”에서 자신들의 영혼, 재능, 완숙된 기량을 펼쳤다. 모두를 뜨거운 마음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아마추어 그룹으로 시작한 때보다 모든 것이 훨씬 나아져서 콘서트를 조직하고 티켓도 판매하였고 ”인민의”라는 칭호도 얻었다. 그러나 ”청춘”이 무엇보다도 열정을 기울인 것은 ‘민족’적인 부분이었다. 티모페이 황의 뒤를 이은 음악 감독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김과 함께 모든 작업을 수행했다.

연출가, 대중 및 음악 비평가들은 갈리나 신 (알토), 조야 김 (소프라노), 블라디미르 강 (테너) 및 예브게니 황 (서정 테너)의 목소리가 라이브로 연주될 때면 마음 깊은 곳까지 감동이 밀려 온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우리 팀이 명성을 얻고 청중들에게 인기를 얻고 회사 “Melody”에서 미니 디스크를 녹음했음에도 불구하고, 솔리스트들과 연주가들은 ‘연예인 병’이 하나도 없이 여전히 평범한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 상호 지원과 협력으로 우리는 항상 함께 했고, 서로에게 질리지도 않았으며, 매년 하듯이 폴리토델 ‘문화의 집’의 무대에서 새해 공연을 했다. 안타깝게도 보랴 토흐타후노프가 세상을 떠났고 조야 김이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우리의 보컬리스트 밀라와 쌍둥이 보컬리스트인 발레리 김과 발렌틴 김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갈리나 신과는 꾸준히 연락을 하고 지내고 있고 평생의 우정으로 이어 나가고 있다. 블라디미르 강과도 연락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예술성 개인의 운명이 어떻게 변해가든지 ”청춘”은 함께 한 모두에게 영혼과 삶에 깊은 인상을 영향을 끼쳤다. 팀에서 10 년 동안, 나는 우리 팀원들과 많은 것을 보고 경험했다.

연주 투어를 통해 우리는 우즈베키스탄과 이웃 공화국,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을 여행했으며 1978 년에는 ‘문화의 날’을 맞아 소련 예술 대표로 울란 바토르를 방문했다.

아버지에 대하여

“청춘”에 관해 말하면서, ‘폴리토델’ 집단 농장의 전설적인 회장인 티모페이 그리고리예비치 황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 모두가 아는 이유로 예브게니 티모페예비치는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앙상블 조직과 활동에 황 회장의 역할은 아주 큰 힘이 되었다.

그 당시 “사회주의의 대표적인 모델”이라고 불리는 집단 농장은 현대적인 인프라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큰 헌신과 노동 성과 그리고 수준 높은 모범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이 표준이 되었다. 티모페이 그리고리예비치는 일과 삶과 휴식이 공존하도록 완전한 조건을 만들어야 하고, 사람은 그렇게 일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주 잘 이해했다. 또한 그 자신이 스포츠와 예술의 열렬한 팬이기도 했다. 집단 농장에는 ‘Pakhtakor’ 축구 팀, 여자 필드 하키 팀이 있었으며 집단 농장의 ‘문화의 집’은 공화국에서 세 번째로 많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 강한 경영자이자 리더였던 아버지는 항상 한걸음씩 앞서서 생각하고 계셨다고 예브게니 티모페예비치는 기억한다. – 어린 우리들이 전 소련에 유명해질 것에 대해 상상도 못하고 그저 기타 치는 것만 좋아라 했을 때 아버지는 어떤 내면의 본능적인 감으로 우리의 미래를 예감하셨다. 아버지는 무언가를 시작하고 착수하면, 항상 그것을 완벽하게 키워 나갔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축구 팀이면 반드시 메이저 리그, 하키면 하키, ‘문화의 집’이면 또 가장 현대적으로, 앙상블이면 당연히 각종 대회와 축제의 우승을.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책임감 있고 정확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도 아주 엄격하였다. 조직을 만들고 유지하고 발전시키고 지원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해 아버지는 항상 수단과 방법을 찾아 내셨다. 때때로 아버지는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70 년대 후반, 전문 음향 장비 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독일의 유명한 사운드 회사인 Dynacord이 모스크바에서 심포지엄을 개최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이 이 회의에 티모페이 황을 대신해서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김과 함께 급하게 그곳으로 날아갔다. 아버지는 앙상블에 꼭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 문화부를 통해 만 루블을 조달했다. 그러나 이 금액으로 부족했다.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2 천 루블이 더 필요했다. 아버지는 비용이 초과되는 일로 인해 몹시 분개했지만 어째든 2 천 루블을 마련해서 우리에게 보냈다. 장비가 ”폴리토델”에 배달된 후 장비를 연결하고 조정하고 테스트했다 (‘문화의 집’의 유리를 거의 깰 정도였다). 아버지가 직접 방문한 레니나바드의 실크 공장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데시벨은 거의 천정을 뚫을 것 같았다. 그는 대규모 공연과 특별히 개조된 방에서만 장비를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나중에 우리는 그것에 익숙해졌다. 오랜 시간 동안 Dynacord의 유명한 장비는 전문 보컬 연주팀 (Yalla, Scythian, Guldasti)과 음악과 악기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찾아와 볼 정도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티모페이 그리고리예비치의 주도로 ”청춘”의 투어 활동을 위해 대형 리비브 버스를 구매했다. 회장은 재능과 무대에서 공연하려는 열망뿐만 아니라, 전문성으로 무장하고 공연 기술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티모페이 황 회장은 보컬리스트들이 함께 하는 수업의 경우 우즈벡 국립 필하모니의 최고 보컬 교사 표트르 페도로비치 볼코를 특별히 초대했다.

의장의 조언에 따라 A. Navoi 극장의 솔리스트 발레리나 엘리자베타 니콜라예브나 김이 안무를 맡은 무용 팀을 “청춘”에 포함하여 각 공연마다 민족 전통 무용 그리고 현대 무용을 선보였다. 시간이 허락되면, 그는 팀의 리허설에 와서 마지막 줄의 의자에 앉아 보곤 했다. 그는 특히 갈리나 신이 공연한 A. Pugacheva의 레퍼토리 “앤티크 시계” (Старинные часы)를 좋아했다. 놀랍게도 티모페이 그리고리예비치는 계속해서 그녀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 재능 있는 연주자, 완성을 향한 열정, 다양한 레퍼토리 (러시아어, 한국어, 우즈벡어, 카자흐어, 영어, 이탈리아어 및 기타 언어로 된 노래를 포함하여 매우 광범위한), 전문 교사로부터의 수업, 티모페이 그리고리예비치의 강력한 지원, 당시의 시대 상황 등이 “청춘”의 시대를 만들었다고 예브게니 티모페예비치는 결론지었다.

우리가 만난 저명인사들에 대하여

– 우리 활동의 특성상 물론 우리는 대중과 정치가, 유명한 예술가, 우주 비행사, 작가, 작곡가, 운동 선수를 만나야 했다고 예브게니 티모페예비치는 말한다. – 이 만남은 주로 그들이 집단 농장에 대해 알기 위해서 방문했을 때 우리의 “폴리톨델”에서 이루어졌다. 우리의 집단 농장을 방문한 정치인들 중에는 콤바인으로 추수할 수도 없을 만큼 크게 자란 6 미터 옥수수에 놀란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쉐프도 있었다. 또 모하메드 아이유브 한 파키스탄 대통령, 쌀 재배의 업적에 놀란 베트남 호치민 대통령. 내 기억으로는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 소련의 인민 예술가 조셉 콥존 (그의 싸인이 있는 사진은 황만금 박물관에 걸려 있다), 유명한 TV 사회자이며 여행자 유리 센케비치, 작곡가 미카엘  타리베르디예프 그리고 여러 사람 등이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나는 소련의 영웅, 우주 비행사 게오르기 베레고보이의 두 번의 방문을 기억한다. 그는 우리의 리허설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겠다고 제안했다. 보통 앙상블은 항상 손님을 위해 노래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소 당황했다. 우리는 그에게 노래를 고르라고 요청했다. 게오르기는 “장군이 되면 얼마나 좋은가”(Как хорошо быть генералом)라는 노래를 불렀고 우리는 반주를 했다. 이렇게 우주 비행 영웅과 ”청춘”의 즉석 공연이 되었다.

– 1978-79 년에 나는 팀을 떠났다고 예브게니 티모페예비치가 대화를 마쳤다. – 나는 도로 기술 학교를 졸업한 다음 연구소를 졸업하고 가수가 남자의 직업이 아니라고 믿는 어머니의 설득으로 나의 전공 분야로 돌아 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오랫동안 기타를 손에 들지 않았지만, 혼자서나 친구, 가족 축하 행사에서 노래를 자주 부른다. ”청춘” 시대에 좋아했던 이탈리아 노래 “Bella”와 한국 유행가는 지금도 나의 레퍼토리이다. 아이들 중 아무도 음악의 길을 가지 않은 것이 아쉽다. 딸 에카테리나는 보컬 능력이 뛰어나지만 가수나 음악가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청춘”과 함께한 나의 시간들에 나는 어떤 후회도 없다. 반대로, 그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다시 그 길을 갈 것이다…

 글: 나탈리아 석

사진: 티모페이 황의 에세이 ”청춘” 중

‘아주 오래 잊고 지낸 날들의 멜로디’에서

번역: 김숙진